강의자료실 웰빙칼럼 4.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날개짓
2013-03-11 20: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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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날개짓

 

 

[강사뉴스 칼럼니스트 소개] - 글쓴이 김용진 웰빙전문교수 1호는 대학에서 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던 중 이론적 차원에서 머무름을 거부하고 실천적 영역으로 과감히 뛰어 들었다. 이후 국제웰빙전문가협회를 설립하고 협회장으로서 다양한 일을 실천하고 있다. 행복지도사, 행복교육사, 행복상담사, 행복나눔사, 행복 코디네이터 자격과정 창시자이며 수백명의 교수 및 강사들의 멘토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자격 관련 전문 교재 '행복지도사','행복교육사','행복상담사','행복나눔사'를 비롯하여 단독저서 8권을 비롯하여 20여권의 공저가 있다.<강사뉴스 편집자 주>

 


 

 

 

 

▲ 행복지도사, 행복교육사, 행복상담사, 행복나눔사 자격과정 50기에서(2013. 1. 31)

 

 

 

 

그리스 신화중 과학문명을 신으로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조용한 사색거리가 되는 신화가 있다. 그것은 밀랍 날개를 달고 자만심으로 하늘을 날아 오르던 이카루스의 추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의 분노로 감옥에 갖힌 한때 영웅이었던 데이달루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하여 아들 이카루스에게 밀랍으로 틈실한 날개를 만들어 달아 주었다. 그리고 하늘을 높이 날아 오르는 방법도 전수해 주면서 신신 당부를 했다. “이카루스야! 너는 반드시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되 너무 높이 날아 오르지 않아야 한다. 만일 네가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뜨거움에 밀랍으로 만들어진 네 날개가 녹아서 추락하고 만다. 그렇다고 너무 낮게 날아도 안된다.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너의 날개를 적실테니까.”

 

 

야심과 정복욕으로 뒤범벅이 된 이카루스가 날아 오르던 곳은 자연이었고 이카루스의 날개 또한 자연에서 얻어진 생성물이었다. 그런데 이카루스는 자신의 본질을 잊고 뜨겁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향해 끝없이 다가서는 무모함이라는 병에 걸려 들었다. 결국 이카루스는 자신의 몰락을 초래한 장본인이 되었다. 인간의 브레이크가 파열된 욕망은 자연을 벗삼아 살던 예전의 삶을 초라하게 생각하고 경멸하기 쉽다. 그래서 앞뒤 못 가리고 울고만 있던 자신을 품어주던 요람이었던 자연을 제 멋대로 갈아 엎어 경작(cultivate)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가운데 하나 둘 얻어진 재미는 이기심의 극치로 치닫게 되어 침묵하는 자연을 살륙하는 정복(conquer)하게 되었다.

 

자연은 인간만의 터전이 아니라 모든 생명 존재들이 공통으로 더불어 누려가야 할 삶의 그라운드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바로 자연이다. 성경은 그것을 에덴동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창조자 하나님도 겸손히 그리고 조용히 거니시는 동산이 바로 자연이라는 대상이다. 인간이 이름을 붙여주고 인간이 친구가 되고 서로 더불어 좋은 것들을 선물하고 교환하는 벗으로 인간에게 다가 와 있는 대상이 바로 자연이다. 인간이 광퍅해지는 순간에도 자연은 생명을 포용하고 더불어 생명의 씨앗을 유전시키는 역할을 소리없이 묵묵히 감당해 왔다. 인간의 무모하고 무례한 도전과 파괴앞에서도 오로지 침묵의 신음을 화산의 용암처럼 토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자연이 몸을 뒤틀면서 내는 울부짖음의 무성음을 현대인들은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우등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자만하는 현대인들보다 배고프고 초라하게 살아갔던 고대인들이 훨씬 더 자연을 많이 생각했던것 같다. 그들은 비록 배가 고픈 시절을 살아가야 했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을 받아주고 채워주는 자연에 대한 깊은 사색의 시간을 많이 가졌었다. 그러한 태도는 현대 문명의 못자리같은 고대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연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멸을 향한 탄생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피시스(physis)라는 단어로 자연을 지칭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생성에서 사멸의 과정을 가능케 하는 운동이라는 의미인 키네시스(kinesis)로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주 생성의 기본적인 4대 요소를 흙과 공기 그리고 물과 불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자연을 잘 표현한 그리스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의 생각처럼 자연은 흙에 물과 산소를 비롯한 공기가 빛을 받아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자연관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가 자연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그것은 자연의 운동력을 마치 ‘자연 = 생명력이 있는 유기체’로 이해하는 현대적인 가이아 이론(Gaea theory)과도 상당부분 일맥상통하는 사상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자연은 인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이라는 젖꼭지에서 인간은 젖을 빨아 먹고 자연을 활보하며 살아간다. 아이러니 하게도 현대 인간들을 자연의 젖을 빨아 먹으며 생긴 그 소중한 에너지를 자연을 짖밟고 파괴시키는 동력으로 대부분 허비해 버린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이란 존재는 역시 자연의 젖꼭지를 빨아 먹는 동안만 존재할 수 있는 짧은 신호등에 의존하여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행인에 불과하다. 달나라로 이주해 간다고 한들 지구상에 있는 자연의 일부분을 가져가서 증식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그렇게 무례를 범할수는 없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는 레비아탄의 마법에 걸려 스스로를 망치고 있다. 현대인들의 생활 도처에 과학이라는 스탬프가 찍히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현대인들의 삶 자체가 과학적 논리에 근거하여 돌아가고 있으며 그 공간을 과학적 산물들로 채워가고 있다. 심지어 가장 자연적이라고 생각되는 채소들도 이젠 흙, 공기, 물, 불 이라는 자연 그대로의 조건을 닮은 노지에서 재배된 자연적인 농산품들도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자연과는 격리된 공장이라는 거대한 새로운 농장의 일정한 조건하에서 치밀한 수치에 따라 부여되는 영양소를 먹고 강제적으로 사육된 농작물들이 증가하고 있다. 공장에서 생산된 수많은 식품들과 농산물들의 안전성과 무해성을 강조하는 부류도 없지 않겠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의 생육을 위한 노력이 필요도 없이 마치 게이지 안에서 24시간 주어지는 사료만을 먹고 폐기되는 닭을 생각해 보라. 닭의 일생을 살면서 그 흔한 흙을 한번 마음 편히 제대로 밟고 그 흙에 부리를 비벼 보기나 했을까? 따뜻한 태양빛에 온몸을 모래 목욕으로 털어내며 행복한 감상에 젖어든 적이 있을까? 파릇 파릇한 새 싹들을 찾아다니며 입맛이 도는대로 뜯어 먹은 적이 있을까?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들을 잡아 먹으려고 짧은 두 다리로 높이 뛰기를 해 본 적이 있을까? 비가 내리는 날 비를 맞으며 시원하다는 감상에 젖은 적이 있을까?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들을 감상하며 즐거운 날개짓을 해 보았을까? 그런 경험이 없이 오직 환히 밝혀진 전깃불 아래에 항상 똑같이 배달되는 사료통에 얼굴을 쳐 받고 끓어 오르는 스트레스를 먹이를 삼키는 일로 해소하다가 낳은 달걀! 그런 환경에서 산란된 달걀에서 어떤 생명력을 어떤 에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일본 과학자들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방울 토마토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추적 조사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방울 토마토를 열심히 생산하여 한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로 판매하여 소득을 올리면서도 자신들은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 섭취로 인한 당장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거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연구중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멸망은 인류 스스로 일으키는 이카루스의 날개짓 때문이다. 이렇게 질병에 감염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가 바로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 세균을 이해하지 못했던 원시인들은 자기 관리에 부실해서 고통의 노예가 되었었지만 현대인들은 자기 욕심을 절제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이! 더 빨리!”라는 생산 목표를 버리지 않는 한 현대 인류는 이카루스의 녹고 있는 밀납 날개짓처럼 머지않아 심연의 바다위로 추락하고 말 것임을 미래학자들, 신학자들, 역사학자들, 정치학자들 그리고 평범한 나 같은 촌부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자연의 벗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 되는 첫 스텝이 됨을 빨리 직시하자. 약국을 병원을 쫓아 다니는 사람은 결국 병도 못 고치고 병의 노예가 되고 만다. 환자들의 2차 감염도 믿었던 병원에서 제일 많이 발생하며 불치병으로 가는 주요 원인중 하나도 바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섭취하던 약물 중독에 의한 것임은 이미 밝혀졌지 않는가?

 

자연은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그에게 생기를 넣어 준다. 자연은 계절이 바뀜에 따라 순응하는 원리를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은 거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는가? 60여년간 자연을 유지해 온 비무장지대 안에 살고 있는 짐승들이 위장병이 나서 혹은 관절염이 생기거나 고혈압, 당뇨, 중풍, 암과 같은 고질병에 걸려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없다.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연스러움에 익숙해 진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치유이고 그런 의미에서 치유는 본래의 건강으로 복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틈틈이 자연으로 찾아가서 자연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기회를 만들어 보자. 몸이 약하면 보약을 먹으려 하지 말고 자연으로 들어가자. 몸이 아프다는 소리를 하기 전에 내 몸에 자연이라는 예방주사를 놓아보자.